이 글은 왜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지에 대한 이유이자, 목적이 될 것입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내용이고 개인의 회고록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한 사람이 어떻게 삶의 이유를 찾게 되었는지의 과정이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08년 봄. 꿈꾸던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캠퍼스의 낭만도, 그리고 내 인생의 진로도. 여느 신입생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누구에게나 나라는 존재는 남들보다 늘 특별하기에 그 설레임마저도 남다른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남다른 행보를 해야한다고 믿었던 20살 봄의 나는 과감하게 지도 교수님을 찾아갔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성공한 자로부터 인생의 비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생활 백서와 같은 ‘나에게만 알려주는' 정보를 얻어 그대로 생활할 요량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XX군이 스스로 찾아야해요"
이것이 내 희망찬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이었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모든 궁금증이 풀린채로, 또 풀리지 않은 채로 상담이 종료되었다. 나는 속은 것이다. 지난 20년간 좋은 대학만 가면, 서울만 가면, 좋은 과에 가면 고민 없이 진로도 알아서 생기고, 고3 수험생과 같은 고생은 없으며, 예쁜 여자친구도 생길 것이라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모든 말씀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실로 거대한 배신이었다
그 때 까지 누구도 진로는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수능문제에는 답이 있었고 그 답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인생길이라 믿고 살아왔는데, 그 답만 잘 맞춰서 소위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꽃길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그 말만 철썩같이 믿었는데. 정답도 없는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니. 이루 말할수 없는 배신감과, 어떻게 그 길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 더 이상 징징댈 수 있는 어른도 없어져버린 외로움. 이것이 20살의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어른이 되어서 좋은 건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신감과 막막함, 외로움은 20살의 갓 어른이 된 어른에게는 다소 무섭고 무거운 감정이었고 술은 그 감정에서 도망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 나는 그래도 사회가 규정하는 명문대학에 왔다는 승리감과 안도감이 들었고, 불안한 와중에 그 안도감이 참 좋았다. 그래서 계속 취하고 또 취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땐 어쩌면 맨정신 상태에 있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내 인생 철학은 학교 앞 지하 호프집에 있었다. 시간에 상관없이 어두컴컴하게 밝은 호프집에 있는 시간이 곧 인생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어른이 된 어른들과, 어른만 갈 수 있는 곳에서, 어른들의 전유물인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며 제법 어른스러운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제법 고민을 해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덧붙이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인생은 원래 답이 없는 것이라는 둥, 그렇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라는 둥, 그래도 그 답을 알아가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는 둥.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치열한 고민도 하지 않았으면서 고민해본 척, 어른인 척, 그렇게 어른처럼 보이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짜 어른이라 믿었던 시간이었다. 술자리에서 만난 나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도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후에도 이따금씩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기는 했으나, 스스로에게 최대한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술로, 친구로, 동아리 활동으로 바쁘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지나가고 감사하게도 정신없이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되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어찌되었건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감사하게도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다보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냥 그 회사에서 열심히 해서 나중에 임원이 되면 잘 사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 나의 20대 후반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 그렇지는 않았다. 20대 초반에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이란 무엇이고, 왜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외치며, 숙취로 괴로워 하는 것이 사실은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는 것이라 오해 해가며, 때로는 겉멋에, 때로는 진지하게 인생의 목적을 논하던 친구들도 모두 취업을 했다. 그리고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직장에서의 생존으로 바뀌었고, 어떤 회사가 더 다니기 좋은지를 비교하며, 이제 결혼은 어떻게 할지, 또 서울에서 집은 어떻게 장만할지로 변했다. 청바지와 학교 점퍼가 잘 어울리던 친구들이 면바지와 셔츠가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가듯,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옷장에서 자고 있는 학교 점퍼처럼, 치기 어린 고민인양 서서히 잊혀져가게 되었다.
나는 특히 회사가 매우 일이 많은 축에 속한데다가, 영어도 잘 못하는데 외국계 회사에 덜컥 취업하는 바람에 사회 초년생 때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초반 1년은 과장을 더하지 않고 평일 하루 3시간을 자도 일이 항상 밀렸기에 잠을 충분하게 자는 것을 소망하면서 동시에, 일이 너무 많아서 일 할 시간이 더 있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 3시간 밖에 못 자는 다소 극단적인 시험기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3시간을 자며 생활하는 사람의 가장 큰 소망은 하루 4시간을 자는 것이다. 기본적인 잠을 자지 못하면 그 외에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좋은 것을 구경하는 것,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수면 이외의 소망은 부차적이고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어려울 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옛 말에 틀린 말 하나 없다고, 동시에 극단적인 환경에 가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여실하게 드러났다. 주중에는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주중의 고생을 보상받기 위해 놀거나 잠을 자야해서 시간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 와중에도 꼭 시간을 내는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후배들, 친구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내가 대학교 때 속했던 학회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나에게 다양한 고민으로 개인적으로 연락 오는 후배, 동료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평일에 잠을 2시간, 1시간 자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내가 수면에 대한 나의 본능마저 거스르며 하는 일은 나에게 보통 의미가 아니라는 확신을 그 때 가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나에게 무엇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특별한 일이, 나의 10년간의 질문이었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이후에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의 사명은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기에, 최대한 남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고, 살 것이라고.
그래서 삶의 방향성과 목적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선 열심히 그 목적을 구하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해내는 것, 남들이 뭐라고 해도 해내는 것, 내 본능을 억눌러가며 해내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길 바란다. 당신이 지치지 않고 오랜 기간 해온 흔적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 그 안에 당신의 삶의 목적이 있다.
당신이 지치지 않고 하고 있는 그 무엇이 어쩌면 당신 삶의 목적을 알려주는 가장 큰 힌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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